단속(斷續) 된 시간



개기월식이라는데 새벽 2시부터 마당에 나가 한참을 지켜봐도 별 변화가 없었다.
달을 너무 오래 쳐다봤더니 어질어질했다. 달이 덜덜덜 떨렸다.
달을 보며 고개를 이리저리 좀 흔들어보면 정말이지 달이 덜덜덜 떨렸다.
나무들은 그대로인데 달만 막 흔들린다.
언제 한번 보름달 뜬 날 해봐라. 정말 그렇다.
아마도 시신경에 담긴 잔광 때문이지 싶다.

이래저래 친구와 밤 새워 달을 지켜 봤다. 아니지 달을 추적했다.
달은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마당에서 보다가 성곽에 올라가서도 보고 거기서도 사라지면 차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를 달리며 달을 좇았다.
달은 밤새 조금씩 지구의 그림자에 따먹혀 들어갔다.

조금 조급한 기분이 들었다.
우주의 문이 닫히기 전에 다시 그곳으로 돌려보낼 우주소년이라도 데불고 다니는 것 같은.

새벽 다섯시쯤 됐을까?
정말 거짓말처럼 달이 하늘에서 사라졌다.
빛 번짐도 없이 완전히 사라졌다.
힌참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달이 사라지고 나니,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달아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있던 것이 없어졌다.
곁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죽는 게 저런 건가 싶다고.

어쩌면 사라진 저 모습이 본래의 모습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태양이 달을 비춰주지 않는다면 저것이 본래의 모습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환영이 사라지면 저렇게 아무 것도 없는 깜깜한 하늘이겠지.
차 떼고 포 떼면 세상에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거짓 된 모든 것들을 나서서 귀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조금씩 여명이 밝아왔다. 한참을 지켜봤지만 달은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혹 보이지 않는 사이에 북악산 서편으로 사라진 것은 아닐까 싶어 팔각정까지 달려봤다.
늘 북적이는 곳이지만 아주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달은 없고 대신 푸른 기운 속에서 북한산 봉우리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향로봉 비봉, 사모관대바위, 문수봉, 그리고 우뚝 솟은 보현봉까지...

어디선가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점점 빨라지는 연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나는 다 잃어버렸던 어떤 시간들을 떠올렸다.
말하자면 개기월식은 시간의 거대한 셔텨였다.

지리산에 내려가기 전, 북한산을 처음 알았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주마간산처럼 지나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잊어버렸던 시간들이다.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는 지난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는 장소들이 바뀌어서 그런지 지난 시간의 사이사이가 무거운 셔터로 봉인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학시절도, 지리산에 살았던 시절도, 히말라야 언저리를 헤매던 시절도, 그리고 다방을 찾아 전국을 돌던 시절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 시절 내가 적었던 책들을 이따금 다시 보게 되면 낯설다.
나는 잊어야 했던 걸까?
 
아무튼 새벽녘 북한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잃어버렸던 한 시절이 가슴께를 훅 훑고 지나갔다.
슬픈 장면들도 아닌데
잃어버렸던 시간들을 잠시 잠깐 느끼는 것만으로도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이제 막, 한 시절이 또 닫힌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낯선 아침이 밝았다.




ps.
다음 주중에 '다방기행문'이 나온다고 한다. 새 책을 내기는 3년만이다. 얼마 전에야 원고를 넘겼는데도 그때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뭔가가 또 시간을 가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