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의 초배지

 

한 달에 한 번씩 암자기행을 함께 다니는 사내가 있는데

이번에는 충청남도 서산의 공용터미널 앞에서 만났습니다.

건널목 너머에서 반갑게 웃으며 건너오라고 손짓하는 얼굴을 보니

저승을 고향으로 둔 동향 사람 같은 이 기분은 뭘까요.

차에 올라타서 하늘이 숨겨뒀다는 천장암[天藏庵]으로 향합니다. 

그는 십여 일 전라남도 땅을 돌다가 오는 길이라고 하네요. 꽃들도 많이 보았다지요.

한참 산길을 오르는데 그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꺼냅니다.

 

보성 어디를 지나는 길이었더래요.

다 쓰러져가는 폐가가 하나 보이길래 차를 멈추고 들어가 봤습니다.

박쥐들이 사는 곳인지 박쥐 똥이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더라구요.

너풀거리는 벽지를 뜯어보니 그 속에 신문지로 초배지가 돼 있더군요.

1968년 어느 날의 한국일보였습니다.

그걸 보는데 이유도 없이 눈물이 막 쏟아질 거 같더라구요.

 

아무래도 이 사내는 봄꽃을 너무 많이 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산속 높은 곳이라 그런지 천장암은 아직 꽃이 없더군요.

하지만 이곳은 기운이 좋은 곳인가 봅니다.

오후 늦게 도착해서 해질녘까지 있었는데 뒷목곁이 시원시원해지더라구요. 칼날이 번뜩이는 것 같기도 하고.

경허스님이 머물렀다는 부엌에 딸린 방에 들어가보니

비니루 장판이 깔려있고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수도 없이 좁은 방이네요.

나도 하마트면 눈물이 날 뻔했네요.

 

 

 

꽃이 피었다고 따스하다고 다정하다고 그런 말할 여력도 없는 이들 많지만

그렇다고 꽃이 피고 따스하고 다정하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굳이 말하는 것도 아니라서

어느 봄날 나는 텃밭에 씨를 뿌렸더랬지요.

 

 

 

집에 돌아와보니 상추도 쑥갓도 토마토도 깻잎도 다들 잘 올라와 있네요.

현관 앞에는 마가렛 하얀 꽃을 한 줄로 죽 심었는데,  매일 아침 녀석들이 유치원이라도 가는 듯 환히 웃네요.

고추는 고추대를 세워줘야할 만큼 제법 키가 컸습니다.

그 누군가의 집에서 분재로 키웠던 인동나무 고목들은

이제 우리집 마당에 퍼질러 앉아 잎들을 피워내네요.

이제 곧 꽃도 피어나겠죠.

내 무릎께 간신히 되는 벚나무도 꽃을 피웠습니다.

 

 

 

9년전에 이곳으로 이사올 때 마당에 내두었던 탁자가 그 사이 비바람에 다 썩어 문드러져서

새로 탁자와 의자를 마련했습니다. 동네 할머니들이 가끔씩 우리집 마당에 와서 앉았다가 가시네요.

왠 일이시냐고 물으면, 그냥 좀 쉬었다 가련다고...

집 뒷곁의 살무나무 고목은 꽃잎들을 우리집 마당에 흐트리네요.

젊어서는 열심히 꽃들을 찾아 다녔는데

이제 가만히 있어도 꽃들이 나를 찾아와주는군요.

살짝만 반겨줍니다.

 

 

 

 

들리는 노래는 박이소의 honesty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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