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 자재암과 녹천역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한 자재암(自在庵)이 이 산에 있다. 원효는 잘 알려진 것처럼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경지를 몸소 보여줬던 이다. 속세를 뒤로 하고 출가했던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고는 또 다시 뜻을 세워 이곳 자재암에서 정진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파계승을 자처하며 거지꼴을 하고는 세상의 저잣거리를 구석구석 떠돌았다. 원효는 “출세법(出世法)은 세간법(世間法)을 치유하는 법이고, 출출세법(出出世法)은 출세법을 치료하는 법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누가 촌스럽게 자기극복을 저리 생쑈하며 한단 말인가. 그래도 소요산(逍遙山)은 그 이름만으로도 좋다.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는 산.

 

새벽같이 일어나 동두천 소요산에 있는 자재암에 갔다. 고요한 소요산이 건설의 탄광마을처럼 온통 다 뒤집어져 있었다. 가뭄으로 물은 말라 폭포들에서는 누런 오줌 같은 것이 찔찔거렸다. 같이 간 사진기자는 도대체 한 꼭지를 엮을 사진이 안 나온다고 했다. 법당 안에는 감색 치마에 하얀 브라우스를 입은 보살 하나가 금동 부처를 마주하고 금강경을 읽고 있었다. 자재암은 바위 절벽에 간신히 지어져 마당이 거의 없는데 그 앞으로 뭔가 확장 공사가 한창이이었다. 우리는 마음을 접고 다시 일주문으로 내려가다가 ,그래도 혹여나 하고 근처에 있다는 폐사지로 향했다. 마른 계곡을 따라 조금 오르니 한쪽에 평평한 작은 풀섶이 나왔다. 70줄 넘은 노인 하나가 마른 계곡에 작은 돗자리를 풀고 앉아있었다. 나는 바위에 앉아 숨을 고르고 사진기자는 폐사지를 둘러보며 망초며 이름 모를 여름 잡풀들을 사진기에 담고 있었다. 노인이 어느 틈엔가 내 곁에 와서는 담배 하나를 얻었다.

 

보통은 노인분들이 이 언저리에 와서 쉬곤하는데 요새는 물이 말라 그러는지 통 뵈지 않는다고 했다. 혼자 왔냐고 하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누구냐고 물으니 바로 이 자리에서 만난 어떤 노인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폐사지에서 처음 만난 것이다. 노인이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노인은 어떤 분이냐고 여쭈어보았다. 별 할 말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나온 질문이었다.

 

“그 양반 젊어서 인민군 장교였다대요.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서 포항 어디에 몇 년 갇혀 있다가 이승만이 풀어줘다는데, 그 이후로 가족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죽 살아왔답디다. 주책없는 늙은이 같지 않고 말하는 것이 품위가 있는 좋은 사람입니다. 지금은 순복음 교회 장로라 하대요.”

 

기다리고 있는 친구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의 눈에 얼핏 생기 비슷한 것이 도는 듯도 했다. 노인은 이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를 기다리며 혼자 하염없이 아침부터 와서 앉아있는 것이다. 사진기자도 이제 더는 찍을 것이 없는지 곁에 와서 한숨 돌리고 있었다. 노인은 얼마 전부터 사진을 시작했다며 렌즈며 필터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사진기자는 되도록 정성껏 설명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나 나나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노인은 사진에 대해 별 궁금한 것도 없다는 것을. 계곡은 바짝 말라있고 나무 사이로 햇살이 따가웠다. 노인의 질문이 대충 마무리 되어 자리를 뜨려하니, 그는 마치 우리 보고 걱정 말라는 듯 이렇게 말했다. 친구는 이제 곧 올 거라고. 하지만 그가 기다리는 친구는 이제 곧 혹은 영영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다시 일주문을 향해 내려왔다.

 

하산 길에 사진기자가 앙상한 나무 하나를 가리키며, 저것이 개살구나무라고 했다. 어찌 이 여름 숲속에서 그리 쉽게 알아보냐 하니, 땅에 떨어진 개살구 열매 하나를 나에게 가리켰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지만 개살구 열매는 희한하게도 딱 하나만 바짝 마른 흙길 위에 떨어져있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자신의 욕망을 열심히 채운다한들, 사는 일의 쓸쓸함을 달래기에는 아무래도 충분치 않다. 부지런히 일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는 고독한 부자가 종국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누군가는 말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나는 그 시를 처음 읽을 때 기가 막혔다. 그 뻔뻔한 도약이.

 

그보다야 엊그제 어느 후배가 한 말에 더 고개가 끄덕여진다.

"배고파지려한다. 자야겠다"

살찌면 안 되니까.

 

그나저나 소요산은 세상의 그 숱한 산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 산은 낮은 봉우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그대가 산을 오르다가도 또 다른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산이다. 홀로 함부로 솟아오르는 것에 문득 문득 경종을 울려주는 풍경이 이곳에 있다. 자기극복의 환영이나 허튼 무애자재의 꿈을 좀 자제하고 이리저리 걸어볼 만하다.

 

의정부에서 사진기자와 냉면을 먹고 헤어져 전철을 탔다. 심심해서 뉴스를 검색해보다가 독거노인들의 시신을 처리해주는 사람의 체험담을 읽었다. 하루 이틀 혹은 몇달 동안 집안에 방치되어 썩고 있는 시신을 치우러 가면 가끔 포르노가 틀어져 있기도 하고 섹스 인형이 발견되기도 한다고 적혀있었다. 기사를 읽다가 그만 환승역을 놓치고 다음역에 내렸다. 표지판을 보니 녹천역이라고 적혀있었다. 지상에 드러난 역사가 꽤 큰데 나를 빼고는 이 역에 내리는 이도 혹은 기차를 기다리는 이도 하나 없었다.  내가 무슨 스위치를 잘못 만져서 이 세상 아닌 기차역에 문득 내려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적 없는 녹천역에서는 태양의 열기가 철로에 꽂혔다가 저 홀로 튀어올라 허공에서 띵!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지인들 몇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곳은 녹천역이야. 똥 마려. 너무 바쁘지 않으면 휴지 좀 가져다주면 안 될까?

그러니 대충 이런 답장들이 왔다.

그냥 싸라... 날이 너무 더운가벼...노팬티 하기 좋은 날...

누구는 뒤늦게 봤다며 이렇게 보내왔다.

기차 올라, 바지 올렷!

정말 바보 같은 답장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기차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