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없이 깨어나는 11월

 

 

 

세상은 포르노 아니면 유치한 멜로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지만, O는 틈만 나면 이리저리 어리석었다. 하지만 모든 바보들이 그렇듯이 가끔씩은 현명한 사람 같아 뵈기도 했다. 살다가 길을 잃으면 우리는 어딘가로 돌아와 다시 출발해야 할 때가 있는데 O는 구태여 멀리 가지 않고 늘 그 언저리 어딘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무언가를 수용하는 방식이란 흔히 인정하면서 소외시키고 소외시키면서 인정하는 것이지만, 세상은 그를 수용하는 대신 차라리 물들일 뿐이었다. 뭔가 딱히 추구하는 것이 없는, 말하자면 내일이 없는 그가 이 세상에 받아들여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막상 O는 자신을 물들이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알지 못했다. 한데 신기하게도 O의 곁에 있으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속내가 환히 드러나곤 했다. 물론 인간들의 속내라 해봤자 별 관심 갈 만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O 곁에서 아이큐 100만 넘으면 저절로 보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O를 제 각각의 이유로 나름 인정하거나 무시하면서, 아주 다채롭게 자신의 거만을 드러냈다. 오랜 옛날부터 백치란 세상이 함부로 물들이지 못하는 세상의 맑은 거울이었지만, 이제 아무도 백치로부터 자신을 고발당하지 않는 세상이 왔다. 생각해봐라. 지구 밖에 떠있는 달을 보면서 이제 누가 이 세상을 반성하는가. 세상은 이미 자기 변명들을 꽤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O는 다만 물들 뿐, 그 무엇 하나 상대에게 도로 비춰 내거나 하지도 못했다. 한데 언제부턴가 O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그의 사라짐에는 소문도 없었다. 말하자면 O는 누군가의 한때 추억이거나 혹은 유령이거나 하다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이 물들 아무 것도 없다는 절망. 자신의 사라짐에 대해 O가 그리 덤덤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O가 까마득히 잊힌 어느 날, 그가 다시 한때의 친구들 앞에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때의 친구들은 조금 더 늙었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이 세상에 무리 없어 보였다.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야지. 그들도 세상을 사는 데에 늘 무리를 느꼈다. 하지만 세상을 사는 상반 된 두 가지 기준들을 그들은 무리 없이 제 몸에 지니고 있었다. 한때 운동권이었던 것을 자신의 근거인 듯이 말하다가도 자신이 이 세속에서 꽤 성공적이었다는 것으로 거만함을 드러내기 일쑤인 그들이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언가 비난할 것들을 여전히 몇 개씩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씩 짝을 지어 자신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속에서 공범자들처럼 자신들의 죄를 숨기고 있었다. O는 다시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늘 그들의 흠집을 메꾸는 제물로 바보처럼 지내온 시절이 어쩌면 자신의 젊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단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들은 O가 과대망상에 빠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O가 꽤 오랜 동안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을 때, 사실 O는 기로에 서 있었다. 외따로 떨어져서 그의 번민은 꽤 깊었지만, 사실 별 내용도 아니었다. 살던 대로 계속 살 것인가, 아니면 그 스스로도 이제 이 세상의 어떤 입장이 될 것인가. O가 이런 것을 고민한다는 것부터가 이제 스스로도 입장 없는 자신의 인생에 깊은 피로를 느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내일을 꿈꾸지 않고 입장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굳이 듣지 않아도 될 소리를 듣고 굳이 무시당하지 않아도 될 무시를 당하고 사는 일이 O는 이제 힘들었다. 젊어서야 그런 일들에 신경이 쓰일 것도 없었지만 이제 그를 물들일 것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세상의 가치란 게 너무 뻔하고 따분하니 더욱 그랬다. O는 더 이상 바보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이제 와서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뒤바꾼다면 그보다 또 허무한 일이 있을까. O는 쓸쓸한 패배감이 들었다. 간만에 만나는 한때의 친구들과 헤어지고 O는 편의점 앞에 서서 이제 어디로 가야될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글자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갈 데까지 가보자!” 그는 시답잖은 이 말을 얼마든지 비웃을 수 있었지만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멈춰버렸던 제 시간을 부끄러워해야 했다. 세상은 사방이 다 열려있다지만 실은 아무 갈 곳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말은 억지도 결심도 그렇다고 안일한 관성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사람 몫의 인생을 끝까지 사는 것이면 이미 족하고도 족할 일 아닌가.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애초에 없는 것이 인생의 몇 안 되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O는 생각했다. 오해와 상처의 속사정을 끝없이 따져보는 일은 이제 그만 집어치우고 또 다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서 내일이 없는 곳으로 가자. 그래서 한없이 이상한 세상으로 접어들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세상으로. 그래서 그대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이 세상에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매일매일 그대들이 쌓는 거대한 모래성을 한 움큼씩 허물면서 세상의 모든 사라져 갈 것들을 이야기 하리. 하지만 이렇게 간만에 다시 정신을 차린 O는 이미 O가 아닌 지도 모른다. 어쩌면 O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이제는 자신까지 이곳에 내려두고, 그 무엇이 되어서라도 갈 데까지 가보려는 것이었다. 그때 눈물은 영문도 모르고 O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깜깜한 어둠 속으로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