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도 병이라는 말



 

봉다리는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지병으로 오래 앓다가 그가 대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려서는 학교 마치고 올 때마다 엄마가 다니는 공장 앞 브로커 벽 앞에 쪼그려 앉아 바닥에 흙그림을 자주 그렸다. 엄마가 혹 나오나 싶어 빼꼼히 쳐다보다가 목이 조금 더 길어져서는 다시 흙그림을 그렸다. 햇빛은 그럴 때마다 봉다리 등짝에도 비쳤다가 얼굴에도 비쳤다가 했다. 봉다리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단돈 삼십 만원을 들고 영국에 어학연수를 간 적이 있다. 하지만 영국 공항에서는 가진 것 없는 봉다리에게 학생비자를 내주질 않았다. 종일 공항에 잡혀 있다가 여권을 맡기고 임시 비자만 받아 공항을 나왔다. 종일 굶기고 조사를 하더니 내보내주면서 쥬스와 샌드위치가 들어있는 봉다리를 그에게 내밀었다. 봉다리는 그들의 위압적인 태도에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나서 공항을 나오면서 휴지통에 그 봉다리를 확 집어던졌다. 한데 던지고 나서 보니 목이 말라서 휴지통에서 쥬스를 다시 꺼내 훅 마셨다.

 

홈스테이를 잡아뒀던 집의 할머니 도움을 받아, 여차저차 간신히 학생비자를 받은 봉다리는 인근에서 가장 저렴한 학원을 등록하고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대개는 아르바이트 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썼다. 국철을 타고 2시간 넘게 가야 있는 중국집에서 일했다. 영어를 잘한다고 뻥을 치고 아르바이트를 구했는데, 손님들이 재떨이 가져다 달란 소리를 해도 그걸 못 알아들어서 물을 갖다 주기를 몇 개월 했다. 다른 유학생들과는 좀 다른 생활을 하는지라, 근처에 짧은 여행 한번 다녀온 적이 없었다. 그러다 가족과 친구들이 너무 그리워서 10개월 정도 지났을 때 이제 그만 귀국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삼사일 정도 있다올 요량으로 레이크 랜드라는 곳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막상 가보니 별 게 없고 돈도 아까워서 싸구려 숙소에서 하루 자고 돌아와 바로 귀국했다. 나중에 신문에서 보니 그곳이 전 세계 광우병의 첫 발생지였다. 말하자면 그의 영국 연수 기간은 참 외로운 시간이었다.

 

그러다 귀국을 했으니 봉다리는 간만에 가족도 보고 참 좋았다. 엄마는 없지만 그래도 산동네 판잣집이 따뜻하고 포근했다. 다음 날은 바로 친구들도 보고 선배도 보려고 학교 동아리에 들렀다. 한데 방학 중이라 동아리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좀 기다리고 있자니 헐렁한 추리닝 차림으로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봉다리가 어학연수를 간 동안 새로 들어온 후배였다. 후배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데 너무 심심해서 들러본 거라 했다. 낯선 얼굴이지만 반가웠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학기 동안 그 후배와 잘 붙어 다녔다. 주변에서는 봉다리가 그 후배만 너무 편애하는 것 아니냐고 말도 많았지만, 봉다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후배랑 지내면 왠지 재밌고 좋았다. 없는 용돈에 책도 사주고 커피도 사주고 가끔 밥도 사줬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겨울이 왔다. 이제 곧 봉다리도 학교생활을 끝내고 취직을 해야 할 때였다. 어쩌면 그게 학창시절의 마지막 술자리였던 것 같다.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동아리 친구들도 다 가고 어쩌다 보니 그 후배와 단둘이 술을 늦게까지 마셨다. 즐겁게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나누다 밖에 나오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때 후배가 갑자기 봉다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배, 손 좀 이리 줘 봐요.”

그러더니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 봉다리 손바닥에 뭐라고 써줬다. 취해서 정신도 가물가물하고 무슨 글자인지 잘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봉다리는 묘한 행복감에 젖어서는, 하얀 눈길을 따라 휘파람을 불며 집에 돌아와 기분 좋게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세수하려고 보니 손바닥에 삐뚤빼뚤 뭔 글자들이 쓰여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골똘히 들여다보니 손바닥에는 이런 네 글자가 박혀있었다.

...

상식이 별로 없던 봉다리는 그 뜻이 짐작이 가면서도 가물가물해서 국어사전을 찾아보다가 확 얼굴이 붉어졌다. 사전에서 과유불급 말고 쥐구멍이라는 단어를 찾았어야 할 거 같았다. 가난한 봉다리는 거품도 잘 일어나지 않는 비놀리아 비누로 손을 박박 닦았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한탄했다.

이게 뭐꼬? 다정(多情)도 병이구나야.”

 

이상이 얼마 전 봉다리 군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이곳에 적어본 이유는 다정도 병이라는 봉다리의 한탄에 대해 몇 마디 해보고 싶어서다. 누군가를 위해서 깊은 정을 품었던 자신이 안타까울 때 우리는 흔히 그런 말을 한다. 하지만 봉다리는 정말 정이 너무 많았던 걸까? 자기식의 편애를 불편해했던 후배의 마음을 짐작도 못한 그의 다정은 도대체 뭐였을까. 누군가를 위해 시간의 비용을 꽤 많이 써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자신의 호의가 상대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을 원망하는 대신 흔히 자신의 다정을 탓한다. 이것은 또 뭔 인간적인 왜곡일까.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이 사람 마음이지만, 어쩌면 봉다리는 더 다정해야 했는지 모른다. 봉다리는 자신의 다정을 한탄하는 대신, 오히려 제 식의 사심에 눈멀어 상대에 맞는 배려가 너무 부족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디 봉다리뿐이랴, ‘다정도 병이란 말은 어쩌면 세상에서 그저 그런 자기 위안으로 쓰이는 반성의 제스처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마음 따뜻한 봉다리가 참 좋다. 요즘 세상에 어디 그런 마음이라도 내는 이 흔하겠는가. 근래는 가식 떠는 것도 귀찮아서, 염치없는 소리를 진실처럼 막 퍼부어대는 세상 아닌가. 봉달아, 너 나쁘게 적어서 미안해. 하지만 후배에게 쪽팔렸던 일로 네 따뜻한 마음까지 다 버리진 말아. 이제 곧 흰 눈이 펑펑 내리겠구나. 그때만 좀 다시 얼굴 붉히고 훈훈하게 이 세상 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