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 의도할 수 없는 것들.

봄 여름 가을, 어슴프레한 새벽녘이면 공터 여기저기서 꾸물꾸물 귀신들처럼 나타나 텃밭을 가꾸던 할매들도 이제는 그 잔재미마저 잃고 좀처럼 뵈질 않는다. 그래도 가끔씩 마당에서 담배 피다 마주치는데 그때마다 할매들은 하나같이 우리집 처마에 달린 거대한 고드름을 보고 감탄을 한다. 긴 것은 허리춤까지 내려와있다. 한데 왜 우리집에만 이런 거대한 고드름들이 달리나. 가만히 둘러보니 보니 우리집만 처마에 물받이가 없지 뭔가. 하긴 나야말로 물받이 없이 살아온 인생이다. 물받이 같은 건 늘 번거로워했다. 뒷일 생각 않고 그냥그냥 살아왔다는 말이다. 한데 왜 이 겨울은 이런 가난하고 누추한 집에 저리 반짝이는 것들을 달아두었을까. 열심히 살아온 이들도 혹은 제 멋대로 살아온 이들도 별반 차이 없다고 말하는 건가. 이유야 어떻든간에 나는 오랫동안 내 어린 자식들도 멀리하고 홀로 사는 늙은 어미도 잘 안 보면서 살아 왔다. 이 도시의 이상한 변두리에서 배가 고프면 먹었고, 졸리면 잠이 오는 만큼 잠을 잤고, 그러면서도 웬일인지 때론 미칠 것 같은 때가 있었고, 그러면 걸었다. 세상 여기저기 두 다리가 바람에 헐렁헐렁해질 때까지 걸었다. 아 이렇게 말하고 나니 듬성듬성 내놓은 발자국들 사이로 이런 저런 회한이 밀려든다. 하지만 이건 반성이 아니다. 이제는 아무리 용을 써도 못난 그때처럼 아름다워질 수는 없을 거기 때문이다. 나를 버리는 것도 노력해서 될 일은 아니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인데, 일부분 자유로운 건 자유가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자유를 떠올릴 틈도 없이 자유로운 게 자유일 테다, 그것이 고통 속이든 상처 속이든 혹은 절망 속이든. 이제 이 겨울도 얼마남지 않았다. 꿈을 깨면 저 눈들은 다 사라지고 고드름은 추락해서 박살나겠지. 내 못난 시절  뒤에는 그렇게 폐허만 남을 것 같다. 그래도 추락할 곳은 여전히 끝없이 이어지겠지? 그런 희망만 지닐 수 있다면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개처럼 살고 싶다. 하지만 그리 살 수 있기나 한 걸까? 자신 없어서 의심하는 게 아니다. 마치 꿈을 깨고도 잠 속에 머물러 있으려는 건 아닌가 싶어 부도덕한 느낌이 든다.  허무를 잡고 있을 힘이 없어서 허무가 풀어져버린 것처럼 그렇게 봄이 오면 할매들은 또 텃밭으로 모여들겠지. 딱 이때쯤 외계의 거대 혜성이 지구를 들이받아야하는 건데 당분간은 그럴 것 같지도 않고 나는 허전하나마, 기다리지 않아야 기다릴 수 있는 뜨악한 낯선 봄을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