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앵두



여름날 신새벽에 문득 잠에서 깬 적이 있다. 아직 매미들이 울기 전이라 사방이 고요했다. 사방이 상서롭고 좋았다. 목이 말라 슬리퍼를 끌고 수돗가로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꽈당 넘어졌다. 엄지 발가락이 끊어진 줄 알았다. 발가락을 움켜쥐고 짐승처럼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한참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늘에 붉은 덩이들이 가득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무 타는 멧돼지가 한 마리가 나타나서는 가지를 무식하게 훑어 목구녕에 붉은 물앵두들을 우수수 쏟아부었다. 바짝 마른 목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올 봄에도 물앵두 꽃이 피었다. 한데 꽃은 별 품격이 없어서 어찌 보면 황사 속에서 나풀거리는 두루마리 휴지 조각 같다. 품격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오히려 눈에 띈다. 한데 오늘밤은 왠지 서슬 푸르구나. 푸르던 그 여름의 신새벽이 생각나 핸드폰을 꺼내 찰깍 한장 찍어본다. 혹시 밤마다 너는 이러냐? 혼자 이리도 쨍하게 깨어, 뿌연 꽃잎 속에 숨은 저 푸른 빛 다 죽이고, 여름 돼서 붉은 것 맺는 거냐? 골똘히 한참을 바라본다. 하지만 내 시선에는 꽃잎 한 점 흔들리지 않더군.

무엇에나 이면은 있다. 그렇지만 자꾸만 이면으로 향하는 마음은 잘 단속하기 바란다. 이면은 또 다른 이면의 이면일 뿐이니 이면이 숨은 진실일 거란 생각은 어쩜 그대의 너무 재빠른  욕망이지. 보이지도 않는 이면을 미리 나서서 헤아리려는 이들의 경솔함은 비겁하다. 시간을 선점하려 하지 마시고 차근차근 살기 바란다. 모르긴 몰라도 진실은 겉에도 혹은 그 이면에도 없다. 누군가의 이면은 그 사람과 그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함께 꾸는 슬픈 소외의 환영일지도. 부디 봄날에는 하얀 물앵두꽃 즐기시고 여름날에는 붉은 열매 듬뿍 따드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