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 걷는 까만손의 사정

 
 
새벽부터 물이 들어왔다. 까만손은 날이 밝도록 쓰레받기와 바가지로 물을 펐다. 여기저기 비 피해 소식은 들었지만 설마했다. 물은 점점 차올라서 까만손의 반지하 자취방에 저벅저벅하다. 이제 조금만 더 물이 들어오면 침대까지 올라올 터였다. 침대 위에 올려뒀던 휴대폰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알람이 울렸다. 출근할 시간이다. 까만손은 팬티바람으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맸다. 그리고 바지와 양말과 구두를 대충 챙겨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이제 조금 있으면 매트리스도 물에 잠겨버릴 것이었지만 더 이상 월차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까만손은 집을 나와 1층과 2층 사이 계단에서 바지를 입고 양말과 구두를 신었다. 흙탕물이 꾸물꾸물 제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집 밖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건 마치 남의 집 일 같았다. 까만손은 까치발로 조심스레 디뎌서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회사는 토가 나올 만큼 바빴다. 저녁으로는 짬뽕을 시켜먹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억나는 건 다 먹고 남은 짬뽕국물에 빠져있는 한 덩이 깍두기였다. 저녁을 먹고도 밀린 일을 3시간은 더 하고서야 회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니 밤하늘은 푸르고 보름달이 환했다. 지겨운 장마도 이제 끝난 거 같았다. 그의 집은 쪽창 사이로 달빛 부서지는 수영장이거나 아님 진흙뻘일 것이다. 까만손은 귀가를 좀 더 미루기로 하고 편의점에 들러 맥주 세 병을 마셨다. 달빛이 그렇게 맑고 깨끗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집으로 향하느니 차라리 저 달빛을 따라가고 싶었다.   
까만손은 달을 따라 계속 걸었다. 빌딩들 사이로 달이 숨으면 달을 다시 볼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뒤늦게 취직이 되자 친구들이 더 이상은 백수로 살지 말라고 붙여준 이름이지만 까만손은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그럴 줄 알았으면 빗물이 넘쳐오던 아침부터 회사를 안 나갔어도 됐을 텐데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올 때 까만손의 등 뒤에서 찰칵! 하는 거대한 셔터음이 들렸다. 그는 분명 그 소리를 들었다. 말하자면 인생의 한 시절을 가르는 셔터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매일 밤마다 달을 찾아다닌다. 달은 그를 낯선 풍경 속으로 자주 이끌었다. 가끔은 한밤중에 야산으로 그를 데려가기도 했고, 이따금은 인적이 다 빠져나간 빌딩 숲 속으로 그를 이끌었다.  

까만손은 낮에는 주로 잠을 자고 해질녘이면 슬슬 움직였다. 달은 아무래도 세상의 이면만을 자꾸만 보게 한다. 그렇게 석 달여 지내고 나니 다시는 세상으로 편입될 수 없을 거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즈음에서 까만손이 새로 구한 일자리는 박물관의 임시직 경비였다. 밤을 꼬박 새워야 하는 일이었기에 하루 일하고 하루 쉬었다. 박물관 야외에 있는 미술품들을 지키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밤새 순찰을 돌고 꼬박꼬박 순찰 일지를 썼다. 아침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는 빨래를 했다. 그는 대낮이 불편하지만 그가 잠을 자는 사이 빨래는 잘 말라있기를 바랬다. 빨래를 빌라의 옥상에 널고 그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오후 늦게 일어나 집에서 밥을 해 먹고 해가 지면 또 달을 따라다니며 여기저기 걸었다.

달과 함께 보내는 날들이 점점 길어질수록 그는 예전에 없던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쩌다 낮에 가끔 일을 보러 나가면 그는 금세 구토와 현기증이 일었다. 빛들은 너무 강렬하고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제 각각 무슨 전쟁 중이었다. 태양은 아무래도 사람들을 호전적으로 만드는 게 확실해보였다. 우울증 환자들은 햇빛을 많이 보면 좋다는데 그건 어쩌면 우울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호전적이 되는 길밖에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는 이제 다시는 그 빛 속에서 구를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이 떠 있는 밤에는 그래도 꽤 세상이 품위 있는 침묵을 간직하고 있다. 뚜렷이 잘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살펴보려면 꽤 볼 수 있다. 보려고 하지도 않는데 자신을 보이려고 여기저기 아우성인 시간보다야 각자 매너들도 좋은 편이다. 차들이 미어터지던 길도 거짓말처럼 한산하다. 걷다가 아무 곳에나 앉아 잠시 쉴 수 있고 담배도 편하게 필 수 있다. 이따금 잠을 못 이루는 노숙자와 눈이 마주치기도 하지만 굳이 사교적인 표정 같은 걸 지을 필요는 없다. 그만큼 달밤에는 아직 여백이 있었다. 그저 조용히 세상 사람들로부터 루저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서 남 몰래 기생하는 것이 속 편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까만손은 그래도 순수하고 소박한 바람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하루 빨리 세상이 통째로 망하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이민자와 실직자들의 폭동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보다가 까만손은 이곳에서도 폭동이 일어나는 상상을 했다. 더 이상 반지하에는 살 수 없어서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그들이 여기저기 떼지어 날뛰게 된다면, 아마 자신은 그들 중 어느 무리에 걸려서는, 개처럼 맞고 똥처럼 짓밟혀 죽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도 까만손 자신은 환영받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이 시스템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스템에서 잘 좀 살고 싶은 이들인지도 모른다. 까만손은 그보다 한참은 더 세상 바깥으로 밀려나 있는 인간이었다. 그렇게 외로운 세상에서 달을 따라 걷는 일은 어쩌면 까만손이 이 세상에서 가진 마지막 종교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까만손은 아무런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걷고 있는 이 달밤의 공허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명랑한 목소리로 ‘세상의 또 다른 이면인 이 달밤을 즐겁게 걸어보세요’ 라고 선전할 일은 아니었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혼자 하는 달밤의 체조 같은 것이 그의 걸음이었다. 달밤이라는 세상의 이면, 아니 세상의 오지에서 며칠 즐겁게 놀다가 감동의 눈물 한 줄 찍, 흘리고 떠나는 이들은 강호동씨가 나오는 1박2일 팀이면 충분한 것이다. 까만손은 오늘도 달의 위치를 살피며 도심의 깊은 밤을 아무 생각 없이 혼자 걷는다. 그것은 해야 할 일이어서도 아니고 취향의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견딤도 아니다. 임시직 경비 일이 끝나면 그는 손이 까매지도록 또 어떤 새 일을 구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달빛이 그만을 따로 비춰주지도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 달을 따라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