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폭설이 되려나 보다. 한데,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냄비를 꺼낸다든가 혹은 젖은 현관을 닦으려 걸레를 찾다 창밖을 바라보면 그때마다 거짓말처럼 눈이 멎어 있다. 그래서 하던 일을 멈추고 다시 창가에 앉아 있다. 골똘히 바라보지 않으면 사라지는 눈발이라니 원. 모자 쓰고 잠바 있고 마당에 나가본다. 나는 장독대 옆에 서서 항아리들처럼 꼼짝 않고 있는다. 눈이 다시 펑펑 쏟아진다. 기름 탱크를 확인해보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머리에 쌓인 눈덩이가 눈썹 위로 툭 떨어진다. 기름이 반 남았다. 저런 한눈 팔면 안 돼, 눈발 또 사라질라. 눈들은 방향 없이 나부낀다. 제 아무리 골똘히 쳐다봐도 헤아려서는 헤아리지 못할 시간이 그 속에 있다. 나를 늘 따분하게 하는 당신들의 호불호와 관심사도 오늘은 조용하구나. 여기서 발 떼지 않고 저기로 내딛는 자여 방향없이 내리는 이 눈발에 기대어 부디 큰 길 잃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