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인 라면 자판기




검은잉어란 이가 있다. 나는 가끔씩 한밤중 그와 만나서 검은 도시 아무데나 걷는다. 대부분은 황량한 풍경 속을 걸었는데, 쌩쌩 지나가는 차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아무쪼록 그가 검은잉어라면 나는 자라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왠지 그보다는 좀더 수륙양용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정을 제대로 꾸리며 살아가고 있는 그가 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남들이 보면 둘 다 이 세상의 미물인 것은 확실하다. 그나저나 그가 나를 보지 않는 시간에는 세상에서 뭐하며 굴러먹는지 알 턱 없지만, 밤에 만나 이렇게 걷다보면 이 둘은 마치 낯선 타국에서 일하다 잔업 마치고 만난 조선족 동무같이 반갑다.  

언젠가 이 계절 즈음의 일이다. 해질녘 광화문 역사박물관 앞을 걷고 있는데 웬 아주머니 한 분이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내 앞에 멈춰섰다. 자전거는 작아서 초등학생들이 타는 것처럼 생겼다. 저 말씀 좀 묻겠수다. 의정부 가려면 어찌 가얍니까? 목소리만 들어도 조선족 동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의정부요? 자전거로 가시기에는 너무 먼데요. 그래도 좀 알려주세요. 어찌 어찌 알려드리긴 했다. 하나 남은 담배를 귀에 꽂고 담배갑에 어설픈 약도를 그려서. 하지만 그 약도를 보고 그녀가 의정부까지 간다는 것은 검은잉어 똥구녕으로 자라 머리가 들어가는 것만큼 힘든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날 그녀의 주인집 가족들은 어디 여행이라도 간 걸까? 의정부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족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인 거 같았다. 설마 차비가 없었던 건 아니겠지. 간만에 시원하게 달리고 싶었겠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다.

검은 잉어와 엊그제는 남산 순환도로를 걸었다. 벚꽃들이 한창이었다. 공포의 구 안기부 자리 근처에는 '끊인 라면 자판기'가 있다. 자판기 근처에는 소방관재청이 있는데 때마침 야근 중인 직원 하나가 그 근처에서 담배를 피며 서 있었다. 여기 돈 넣으면 사발면 나와요? 아님 정말 끓인 라면 나와요? 그는 사발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하지만 사진처럼 해물은 안 나옵니다요. 그냥 끓인 라면만 나옵니다. 1200원을 넣으니 정말이지 몇 분 지나 자판기에서 끓인 라면이 나온다. 나무 젓가락이 세 개나 나온다. 면 따로 국물 따로 끓인 수영장 라면 맛 비슷한데 면이 꼬들꼬들해서 맛있다. 아무튼 도시의 한밤중을 걷는 기분은 이 낯선 자판기처럼, 별 특이하지도 않은데 기이하다. 걷다가 한적한 도로를 지날 때면 도로 한가운데 앉아 잠시 쉬기도 하는데 그 또한 너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어쩌면 우리가 걷는 이 시간이 통째로 세상과 아무 상관 없는 시간 같다. 그렇게 저렇게 걸으며 방향없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또 뜬금 없이 헤어진다. 아무래도 우리는 조선족 동무는 아닌 것 같다. 헤어질 때 별로 서운하지도 않은 걸 보면. 하지만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소외된 느낌이나마 함께 할 이가 있어서. 이 역시 외론 착각 같은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