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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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 잔설이 얼어서 동네까지 마을버스가 오지 않는다.  할 일 없어서 오후 내내 계속 커피를 볶고 맛보고 했다. 그러다 해질녘에야 간신히 거스르지 않는 맛이 났다. 어질러진 부엌을 정리하고 새로 물을 끓여 커피를 다시 내려본다. 차도 그렇고 커피도 그렇고, 내려 마신다는 말은 참 좋다. 
먹는다는 것이 애초부터 폭력적이긴 하지만, 갈아 마시는 것도 아니고 짜서 마시는 것도 아니다. 내려 마신다는 것은 그대에게 물을 흘려서 그쪽이 내게 내주는 만큼에 고개 숙이는 일이다. 나는 오늘 흰 눈 속에 묻혀 곱게 내려진 갈빛 물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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